펼쳐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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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이 속옷 차림으로 잠이 들고 한참 뒤 메일이 왔다.
보낸 사람은 당연히 오타쿠 친구.
PC로 메일을 보낼테니 확인해보란 내용이었다.
PC를 켜서 파일이 첨부된 메일을 확인했다.
[지금까진 확신할 수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파일은 정답이었던 것 같아.
지금까지 별 의미없이 나열해놓기만 하던 퍼즐 조각들을
정확히 원래 자리에 끼어 맞출 수 있을지도 몰라.
헌데 우선 확인해두고 싶은 게 있어.
무슨 방법을 쓰든간에 그 여자 본명을 알 수 없을까?
하기 싫겠지만 우선 그 여자 소지품에서 면허증같은 걸 확인해봐.
이 자료 대로라면 그녀의 본명은 사토 케이코. 나이는 19살
국내 면허증을 취득한 상태야.
그렇게 젊은데도 아시아 몇개국과 유럽 몇개국을 여행한 경험이 있어.
광동어를 쓸 줄 알아.
해외 은행에 계좌를 뒀는데 거액의 예금을 맡긴 상태야.
좀 더 상세한 설명은 우선 그녀의 면허증을 확인하고 나서 할께.
물론 여기서 그만 둬도 돼. 이건 네가 선택할 문제야.
이 앞으로 나가는 건 그녀의 프라이버시에 접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어느쪽이든 결정을 내린 다음 연락 줘.
기다리고 있을께.]
내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이런 게 아닌데.
그녀가 가진 플로피 디스켓의 내용만 알면 그만이었는데.
나는 친구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걸로 충분해. 고맙다. 나는 여기서 그만둘래.]
메일을 보내고 나서 나는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분명 그녀의 플로피 디스켓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그걸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로 결정내린 채 끝내려고 했다.
그녀는 뭔가 좋지 않은 것에 연관된 듯 했기에...
그러니까 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내 마음대로 망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이상 나아가는 건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들여다보는 행위다.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나는 결국 그녀의 핸드백을 뒤졌다.
지갑에서 몇장의 신용 카드와 면허증을 발견했다.
이름을 확인해보니 사토 케이코라고 적혀 있었다.
생년 월일로 19살이란 것도 확인했다.
나는 친구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녀의 이름은 사토 케이코, 면허증을 확인했다.
파일을 송신해줘. 그리고 설명도 부탁해.]
346
친구는 내 메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엄청 빠른 속도로 답장이 돌아왔다.
[갑작스런 이야기라 믿기 힘들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 면허증은 가짜야, 즉, 위조 면호증.
그 여자는 면허를 취득하고 1년 뒤에 면허 정지를 먹었어.
면허는 다시 재발급 받질 않았어.
왜 그런지 조사하기 위해서 조금 위험한 짓을 했다.
그런 류의 뒷정보를 다루는 녀석하고 거래를 좀 했지.
돈이 들긴 했지만, 돈 내놓으란 소리는 안할테니까 안심해라.
하지만 에어조던은 반드시 받아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둬.
그 여자의 이름 빼고 남은 정보는 모두 가짜야. 19살이란 것도 거짓말.
아마 면허증에 적힌 정보들은 어떤 패스워드라고 생각해.
그래서 이름 이외의 정보는 누군가가 계속해서 바꾸고 있는 것 같아.
입 다물고 있어서 미안해.
하지만 네가 결국 그녀의 지갑을 뒤질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네가 포기해주길 바랬어.
그만둔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는 안심했는데...
결국 너는 나아가는 걸 선택했지. 실망이다.]
면허증도 가짜였구나, 그건 정말 놀랐다.
347
2번째 메일
[우선 GIF 파일에 대한 것.
사진 속 남자애가 가진 물총에 주목해봐.
등록 상표가 찍혀 있어야 되는 곳에 이상한 숫자가 적혀 있지.
보면 알겠지만, 이전 사진 파일에 비해서 손질이 잘되있어.
언뜻 보면 눈치챌 수 없는 수준으로. 아마 프로가 손본 것 같아.]
사진속 남자애는 일본인이었다.
어째서 그걸 단언할 수 있냐면 남자애가 쓰고 있는 모자가
내가 초등학교 운동회때 썼던 모자랑 똑같았기 때문이다.
남자애가 쓴 모자는 사이즈가 너무 컸다.
모자 챙에 얼굴이 가려 입술 이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 아이가 혹시 그녀의 동생이려나.
남자애는 5살 정도로 보였다. 매우 야위어 있었다.
커다란 물총을 꼭 껴안고 있었는데
남자애가 그걸 아주 소중히 여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중한 건 양손으로 꼭 껴안는 법이다.
사진 속 이 남자애처럼.
다른 누군가가 들고 가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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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메일.
[다음은 엑셀 파일.
그녀는 위조 여권을 쓰고 있어.
4년 전에 정부에서 발행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1개월 전 신주쿠에서 위조된 거야.
그 위조 여권을 만드는 비용은 엄청 비싸.
그러니까 어지간해선 들통날 일도 없을 테지만.
남은 건 몇가지 위조와 서류 예금 리스트가 적혀 있는 것 정도.
위조 여권을 만든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아.
몇번이나 위조 여권을 만든 것 같거든, 다른 곳에서.
여기에 그 주소도 적혀 있어.
봐도 별로 뾰쪽한 수는 없을 테지만, 일단 딸려 보낸다.
그리고 메모장.
이건 저번처럼 추측이외에는 손쓸 수 있는 게 없었어.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그걸 복사한 것.
...이건 전적으로 추리 드라마 수준의 추측이지만...
그 여자는 얼마 뒤 해외에 나갈 거야.
목적지는 인도의 델리.
만약 그녀가 1주일 이상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면,
나한테도 명탐정의 자질이 있단 소리가 될테지.
어쩌면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이 복잡한 일이 아닐지도 몰라.
미인이 얶혀 있으니까 뭔가 특별한 일이라고 억측을 내린건지도 모르지.
그 외에도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 줘.
더 이상 골치아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349
나는 공주님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공주님이 말해준 마을이나 공원도 절대 가볼 수 없는 가공의 존재.
정말로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그런 곳.
나는 공주님에 대한 건 아무 것도 모르니까.
심지어 이름마져도 모른다.
친구는 확실하다고 결론내렸지만, 그건 확인의 과정일뿐.
아무도 공주님의 진짜 이름은 모른다.
공주님은 내 손이 미치는 곳에 누워 자고 있다.
부드러운 앞머리가 이마에서 흘러내린다.
작은 등 위로 긴 머리카락이 내려앉아 체형을 드러낸다.
나는 공주님에게 접할 수 있다.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하지만 그녀는 이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다.
내가 영원히 알 수 없는 먼 이국의 땅에서.
내가 손댈 수 없는 과거의 악몽과 함께.
공주님이 눈을 뜨면 어딘가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자.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자.
공주님이 바란다면 아주 먼곳이라도 상관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정 되있지만.
그렇다 해도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공주님의 웃는 얼굴을 기억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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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구가 보낸 메일에서 눈을 돌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친구에게 다시 한번 더 메일을 보냈다.
보낼 파일은 없다.
[어이, 공주님은 그렇게 부자인데 왜 나같은 놈이랑 노는 걸까?
이런 행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여러가지 충격이 겹쳐 넋이 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친구도 그걸 감안했는지 딱히 쓴 소리를 하지 않았다.
[내가 알아낸 정보가 진실일 가능성은 지금 현재 없는 거와 같아.
지금 상태에서 그 여자의 정체는 그림자 같은 거지.
애초에 내가 보기엔 미녀들은 모조리 요정이랑 같아.
거기에 있지만, 손에 닿질 않으니까.
그건 나한테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 거랑 같지.
네 입장에서 보면 사정이 조금 다를테지만 말야.]
미안하지만, 나도 너랑 같아.
358
오후 늦게 눈을 떴다.
공주님과 같은 침대에 누워 고양이가 볕을 쬐며 졸듯이
창문 너머에서 흘러들어오는 햇빛에 감싸여 계속해서 잤다.
먼저 눈을 뜬 건 나였다.
침대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샤워를 했다.
머리속이 깨끗하게 정리됐다.
나는 목욕 타올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공주님을 깨웠다.
머리속이 정리되니 스스로 뭐라 정의내릴 수 없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평범한 남자들이 그러하듯 나는 그녀를 요구했다.
그녀는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거부하진 않았다.
그녀는 나를 상냥하게 끌어안았다.
이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공주님이 욕실에 들어간 사이. 나는 그녀를 위해 할 일을 생각했다.
나 밖에 할 수 없는 특별한 무언가를.
물론 되도록 호들갑스런 게 아닌 것으로.
359
공주님은 약속이 있다며 잠시 시부야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천천히 식사를 한 뒤 호텔에서 나왔다.
만나기로 약속한 곳은 도쿄역.
나는 그녀가 욕실에서 나온 뒤 이런 제안을 했다.
과거 그녀가 자주 시간을 보냈던 공원, 그곳에 가보자고.
동생과 그녀의 소중한 추억들로 가득한 그 공원에.
그녀는 처음 그 곳에 가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내 진지한 표정을 보더니 고맙다고 말했다.
[사실 몇번이나 혼자 가보려고 했어요. 하지만...왠지 무서워서...]
그녀는 나랑 꼭 함께 가보고 싶다 말했다.
도쿄역에 나오긴 했지만, 약속 장소로 잡기에 이곳은 너무 넓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생각한다.
객관적인 규모만이라면 신주쿠 역이 좀 더 크겠지만,
도쿄역은 이상하게 넓고 커보인다.
머나먼 어딘가와 어딘가를 묶는 거점이기에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머리속에 떠오른 감상적인 생각을 애써 내쫗고
공주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한 노력해보고 싶다.
이런 어설픈 생각은 좋은 결과를 내지 못 한다는 건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좀 더 서둘러야 한다.
남은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360
도카이도 신칸센 플랫폼에서 만나기로 한 게 정답이었다.
공주님이 플랫폼으로 달려오는 걸 바로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우선 커피를 마신 뒤 요코스카행 기차를 타러 가기로 했다.
그 동안 이야기는 별로 나누지 않았다.
공주님은 내 손을 잡고 걸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가는 곳은 추억이 죽은 땅.
과거의 기억속에 얼어붙어 다시는 녹아내리지 않는 장소.
그녀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 그곳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 가고 싶어 했다.
자신이 잃어 버린 무언가를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기대를 안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하자. 그녀는 동생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나도 동행하는 것이다.
그녀를 위해서 기차의 창가 자리를 확보했다.
나는 그녀의 정면에 앉았는데 그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손을 잡아줘요.]
아무 고민없이 바로 그녀의 옆에 앉았다.
객차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나는 CD 워크맨에 이어폰을 꽂아 왼쪽 부분을 그녀에게 건네줬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
[딱히 듣지 않아도 돼, 하지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 거야.]
전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548
요코하마를 지날 쯤 바깥이 어두워졌다.
회사 간판이나 주유소의 오렌지색 불빛이 유리창에 반사된
그녀의 얼굴과 겹쳐 시야 너머로 사라져 간다.
드문 드문 흘러가는 민가의 불빛은 어째서인지 외롭게 느껴진다.
아마 그녀도 나와 같은 감상을 느끼고 있는 걸까.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이 약하게 떨리거나 굳어지기도 했다.
그녀에게 춥지 않냐고 물어보니,
[괜찮아요. 이 정도는.]
그녀는 핸드백에서 핑크색 곰인형을 꺼내 유리창에 기대놓았다.
곰한테도 바깥이 보이도록 머리에 씌워둔 병뚜경 모자를 조절해서.
그 곰인형은 다리가 짧고 몸통은 이상하게 길었다.
밸런스가 안잡힌 몸통은 귀여웠지만 동시에 불안해보이기도 했다.
[이 애는 예전에 이 풍경을 본 적 있어요.
그땐 도쿄로 가는 쪽이었지만요. 이 애의 주인도 이미 없고...]
나는 내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을 그녀의 귀에 마져 끼웠다.
그리고 워크맨의 볼륨을 높였다.
제 아무리 슬프고 괴로운 추억이라도 음악은 그걸 흘려 보내게 해준다.
효력이 바로 나오지 않을지도라도 음악에는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
[너무 시끄러우려나?]
아마 볼륨이 너무 높아 내 목소리를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알아차리곤 괜찮다 말했다.
음악소리가 사라지니 규칙적인 진동 소리가 내 귀를 메웠다.
다른 손님들의 이야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요코스카로 가는 시간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나한테 있어서 엄청 길게 느껴졌다.
그건 그녀의 아픔이 나에게 전염된 탓일까.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549
요소스카 역에 도착한 뒤 나는 자판기에서 생수와 페트병 콜라를 샀다.
콜라 페트병뚜껑을 따서 생수로 씻었다.
그리고 콜라와 생수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내가 그걸 산 이유는 단 하나.
곰인형의 새로운 모자를 마련하기 위해서.
공주님의 입가에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돌아왔다.
나는 그녀의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동안 택시를 잡았다.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공원은 5분 정도면 갈 수 있다고 했기에
바로 그곳에 들르기로 했다.
택시 운전 기사는 가벼운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역 근처 맛있는 라면집이나 싸게 마실 수 있는 선술집을 가르쳐줬다.
지금 내가 알고 싶었던 정보였다.
불필요한 생각은 하지 말자.
나는 그녀에게 돌아 오는 길에 거기에 들러보자고 말하거나,
택시 기사의 딱히 재미있지도 않은 농담에 큰소리로 웃었다.
얼마 뒤 공원에 도착했다. 내가 상상하던 공원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애초에 그곳은 공원이 아니라 신사 였다.
신사 주위 공터에 미끄럼틀과 그네, 자그마한 나무 몇그루가 서있었다.
토리이는 다 썩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미끄럼틀이나 그네도 전부 삭아있었다.
[여기야?]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주위가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발밑에 나뒹구는 쓰레기들을 보고 여긴 공원이 아니라
그저 방치된 공터일 뿐이라는 걸 알았다.
가로등 불빛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기가 맑아서 인지 별과 달이 매우 선명하게 보였다.
입에서 새어나온 새하얀 한숨이 달빛에 닿아 흘렀다.
오랜 시간 신주쿠의 어둠을 방황해 와서 일까,
그녀는 이 곳의 짙은 어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짙은 어둠 속에 녹아드는 듯 조용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건 그녀가 이곳에 올 건 후회하지 않는 것 같아서일까.
아나면 그녀가 녹아든 어둠에 감싸여 있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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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로 덮힌 수도 꼭지.
바람이 흩어버려 흔적도 남지 않은 모래사장.
목이 날아간 석상.
둥치부터 껍질이 벗겨져 나간 나무.
그녀는 그것들 전부에 추억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깡통차기를 할 때 거점으로 삼았던 나무.
아이들의 손때를 탔기에 나무 껍질은 늘 흉하게 벗겨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살아 있어요.
그리고 내년에 다시 싹을 띄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죠.]
그녀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 말했다.
그 때 그 여름.
그녀의 동생도 술래잡기나 깡통차기를 하며 이 공터를
분주하게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일테지.
우리는 손을 잡은 채 좁은 공터 안을 방황했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버린 탓인가,
아이들이 놀만한 기능을 상실한 공터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쓸만한 거라면 담력 시험 정도일까.
신사 역시 복구하는 것 보단 허물고 다시 짓는 게 빠를 정도로 낡았다.
그 낡은 신사 건물을 배경으로 그녀가 서있다.
그녀는 태양이 그려진 건물 천장 나무판을 보고 있었다.
주홍색으로 칠해진 나무판.
나는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 내리는 물방울을 보았다.
분명 뭔가를 생각해낸 걸까.
그 나무판에 어떤 추억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쓰레기 더미에서
길쭉한 막대기를 하나 찾아내서 그 나무판을 힘껏 찔렀다.
엄청나게 많은 먼지와 함께 나무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옛날에 발매됐던 캔커피 깡통도 함께 떨어졌다.
그녀는 깡통을 빙 돌려보며 확인하더니 이내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간신히...돌아왔어...]
그녀는 내 손을 잡은 채 파르르 떨었다.
하얀 숨결이 조용히 번져 나갔다.
553
그 캔커피는 공주님이 용돈을 전부 써서 마련한 동생의 생일선물이었다.
헌데 공주님도 조금 마시고 싶어져서 중간에 같이 나눠 마셨다고 했다.
동생은 깡통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천장 구멍에 던져넣었다고 했다.
당시 동생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깡통을 천장에 넣으려 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이제 충분해요.]
그녀가 충분하다면 나도 충분하다. 돌아가자, 토쿄로.
우리는 요코스카 역을 향해 터벅 터벅 걸었다.
도심임에도 겨울 바람은 매우 추웠다.
내 손에 느슨하게 걸린 그녀의 손가락에서만 온도가 느껴졌다.
이 곳을 방문하고 나니, 우리가 함께 보낸 호텔방이 멀게 느껴진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반걸음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그녀.
왼손에는 곰인형을 들고 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갑작스런 겨울 바람에 이리 저리 흔들린다.
깡통은 들고 왔으려나. 추워서 콧물이 나온다.
호텔에 돌아가면 최대한 따뜻하게 해서 자자.
그 전에 뭔가 먹어야 될 텐데.
머리를 굴려봐도 별다른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
오늘 밤이니까
더욱 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은데
내 머리속은 하릴 없이 표류할 뿐이다.
무슨 짓이든 해서 그녀의 웃는 얼굴을 봐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난 또 그녀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너무 강렬한 욕구에 그녀를 망가뜨리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갈팡지팡.
계속, 계속 갈피를 잡지 못했다.
586
요코스카 역은 이용자가 많은데 비해 비교적 작다.
그래서 해가 지면 근처 상가 건물에 섞여서 역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역 근처 해안가 산책 코스에서 서서
불빛이 반사되어 일렁거리는 바다를 보았다.
추위는 몸속 깊숙히 파고 들어 코트 속에도 온도가 느껴지질 않았다.
그녀의 손이나 얼굴은 바닷바람에 희롱당해 어느샌가 핏기를 잃어버렸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비비면서 온도를 나눠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니 순식간에 손끝의 감각이 사라진다.
그녀의 뺨을 어루만져도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지 않았다.
[불빛이 예쁘네요.]
그녀는 속삭이 듯 말했다.
[저 빛에 뛰어들면 죽을 수 있을까요.]
[몇분 안에 정신을 잃겠지. 날씨가 날씨니 만큼.]
그녀가 갑자기 뛰어들거나 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감상에 빠져 불현듯 입을 열었다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더구나 그녀에겐 벌써 몇년에 걸쳐 찬스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데로 따라갔다.
한참동안 서 있던 그녀는,
[있잖아요.]
[응?]
[만약 내가 지금 같이 죽어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나는 웃었다.
[안 죽어. 절대로.
나는 공주님을 도쿄로 데리고 갈 거야.
공주님이랑 호텔에서 따뜻한 커피를 함께 마시고 싶으니까.]
그녀는 그제서야 발을 옮겼다.
곰인형의 작은 팔을 들어 바다쪽을 향해 바이 바이하며 흔들었다.
그 때 나는 택시 기사의 말이 생각났다.
그 아저씨 말대로라면 이 근처에 맛있는 라면집이 있을 것이다.
맛있는지 어떤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뜨거운 국물을 마실 수 있다면.
우리는 택시 기사가 일러준 라면집으로 향했다.
라면은 의외로 상당히 맛있었다.
그녀는 뜨거운 국물을 홀짝거리며 말했다.
[고마워요, 오늘 밤.]
그리고 그녀는 조금 울었다.
587
도쿄에 도착했을 쯤 자정이 지나 있었다.
막차까진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 우리는 바로 환승 플랫폼으로 갔다.
너무 추워서 웃길 정도로 몸이 마구 떨렸다.
덜덜 떨리던 몸이 잠시 진정됐다 싶으면 또 떨렸다.
추워서 마비되있던 피부에 감각이 돌아오자
이번에는 너무 예민해져서 서로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팠다.
호텔에 돌아왔을 때엔 어느새 새벽 1시가 넘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프런트에 룸서비스로 커피를 주문하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게 1시 30분.
방안에 들어선 나는 온몸에서 뜨거운 열을 발산하며 침대에 쓰러졌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알 정도로 상기된 내얼굴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이마에 손을 대고 뭐라 말을 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뒤 돌아온 그녀의 손에 감기약과 해열제가 들려 있었다.
나는 멍하니 호텔 상비약인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약을 먹는 척 하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일단 감기가 들면 그걸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없다.
그러니까 약을 먹어도 의미는 없다.
거기다 나는 약을 정말 싫어한다.
그녀는 나를 말려들 게 한 걸 후회하는 듯 했다.
이렇게 추운 밤에 요코스카의 어둠속으로 나를 몰아넣은 게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야, 가자고 한 건 나야.
네가 아니라 내가 가자고 한 거야.
내가 너를 울린 거라구.
어쩌면 그녀와 재회한 그날
나는 이미 감기에 걸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회사나 전철에서 옮긴 건지도 모른다.
감기가 잠복해 있다 오늘 우연히 발병한 것이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신사가 있던 공터가 너무 추웠기 때문에 내가 감기에 걸렸다고.
오로지 자신의 탓이라고.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허나 내의지와는 관계없이 졸음이 밀려왔다.
계속해서 눈을 뜨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난 잠결에 내 옆에 누군가 있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공주님의 향기.
여자 특유의 부드러운 체온.
공주님이 내손을 잡고 있어.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거 같아.
이렇게 평온한 어둠에 싸여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588
나는 꿈을 꾸었다.
요코스카 역 근처 산책 코스.
가로등 불빛도 없는 도로를 엄청난 속도로 달려간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간 코스를 따라 마치내 그 공터에 들어섰다.
그곳에 있는 건 여름날의 풍경.
내가 경험한 적 없는 저녁 풍경.
아이들의 웃는 소리와 소란스런 발소리.
그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여자애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니 내가 아닌 내 뒤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다.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는 TV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주 맑고 선명했다.
나는 매미가 있는 곳을 찾았다.
눈을 돌리니 어느새 여자애가 코앞에 서있다.
여자애는 손에 중국제 토카레프를 들고 있다.
목에는 핑크색 곰인형과 붉은색 여권을 줄에 꿰어 걸고 있다.
여자애는 내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여자애는 맨발이었다. 그리고 흙투성이였다.
여자애의 손끝이 토카레프 방아쇠에 닿았다.
달칵 마른 쇠소리와 함께 방아쇠가 당겨진다.
탕!!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총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축했다.
공주님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한테 뭔가 말을 걸었다.
나는 그걸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바깥은 아직 어두웠다.
지금은 몇시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공주님이 입으로 물을 머금은 뒤
나한테 먹여 줬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너무 괴로웠다.
감기 때문에, 방금 전에 꾼 꿈 때문에.
아득히 먼 곳에서 무반주 첼로 소나타 소리가 들렸다.
공주님이 나를 위해서 음악을 틀어준 걸까.
음악에는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체온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뭔가 짠하네요...
답글삭제오랫만에 보는 글! 선플답니다.
답글삭제슬슬 낚시의 냄새가 풀풀 나는군요
답글삭제문장이 기억에 의존한것에 비해 대단히 디테일하며 꾸미는 말이 많고 친구녀석은 설명을 위한 설명을하고있어요,
답글삭제슬슬 소설을 보는 마음으로 봐야겠네요
아아 잘읽었습니다
답글삭제bgm이 정말 좋네요 이번거
답글삭제소설읽고 있는 듯한... 일단 소설을 읽는 마음으로 보겠습니다 222
답글삭제수고하셨습니다 :)
이재 슬슬 소설같은 냄새가.....
답글삭제너무 잘 만든 소설같아서...
답글삭제이젠 뭐 이게 실화든 뭐든 그냥 끝을 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드네요
얼른 후속편을!
어찌됐든 재미있네요.
답글삭제잘읽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뭔가 정말 소설이라면 정말 잘 만들어낸거고
답글삭제실화라면 가슴이 왠지.. 해피엔딩이 아닐거 같은 예감이 ㅠㅠ..
얼마나 남았으려나.. 슬슬 마지막이려나요
답글삭제에? 이거 실화였어요? 처음부터 소설인줄알았는데..
답글삭제델리로 간다면 그녀의 정체는 간디군요
답글삭제샨티 샨티 카레카레야
답글삭제@미요랑 - 2010/10/13 09:49
답글삭제과연, 그럼 저 사진속 수정된 숫자들은 들여오는 금의 양이군요. 중국제 마카로프로 유형사테 wryyyy
@미요랑 - 2010/10/13 09:49
답글삭제간디....악 뿜어버렸다 ㅋㅋㅋㅋㅋㅋㅋ
토카레프를 순순히 넘긴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재밌어요 ㅋ
답글삭제너무 궁금해서 구글링으로 원문 찾아봤는데
답글삭제아직 분량이 2개 이상 나오겠네요 oTL
배경음악 들으면서 번역된걸 읽고싶어서 일단 봉인해 뒀는데
바쁘신건 알지만 최대한 빨리 보고 싶은건 어쩔 수 없네요 ㅠㅠ